점잖고, 교양 있는, 예의 바른 남자. 신사(紳士/gentleman).
오늘날에는 우산이라고 쓰고 근력 지팡이이라고 읽는 매너 봉을 휘둘러 예의를 주입하는 킹스맨 에이전트가 더 선명하게 떠오는 단어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신사는 오래도록 부끄러움을 모르고 당당한 이들이었다. 어쩌다보니 오늘날 게임 시장에서는 선뜻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들. 이성에 대한 깊은 애정이든, 그냥 에로든. 신사는 대중에 야한 게임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당당하게 즐기는 이들을 부르는 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양복을 걸치고 포마드로 머리를 번쩍 빛냈다고 해서 이들을 신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똑같이, 그저 야릇한 게임을 즐긴다고 신사라고 불릴수는 없는 법이다. 신사는 속살 가득 드러낸 게임을 즐긴다고 몸을 저릿이며 흥분하지도 않고, 부끄러움에 괜한 호들갑을 떨지도 않는다. 신사는 그윽한 향이 감도는 커피잔에 코를 얹어 음미하면서 게임의 본질을 탐구한다. 넘어진 여주인공의 팬티색이 캐릭터성에 걸맞은 선택이었는지 고민하고, 거친 전투에 찢어진 스타킹이 허벅지의 탄실함을 적절한 과장으로 묘사하고 있는지 토론한다. 그리고 그 담론의 깊이는 사실 진한 커피향보다도 더 심오하다.
누구보다 신사의 게임 개발을 표방하는 큐리에이트(qureate)의 게임은 그런 의미에서 신사답다.
큐리에이트의 게임은 성인 등급의 게임이다. 하지만 그 에로틱함을 종갓집 전통 한식집에서 포기 김치를 보시기에 곱게 내놓듯 콘솔 출시라는 그릇을 넘지 않게 정갈하게 담아낸다.
지난 26일 한국어화와 함께 국내에 정식 출시된 '프리즌 프린세스 함정에 빠진 공주들'만 봐도 선을 넘지 않는 에로틱함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영혼이 된 용사는 대마왕에게 잡힌 공주의 소환술에 의해 불려왔다. 다시 한 번 공주들을 이끌고 마왕성을 탈출해야 하는 용사. 이번에도 머리 뜯어가며 풀어가는 퍼즐이나 깊은 내러티브적 함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무방비한 공주와 함정에 걸려도 꼭 서비스신 제공 포즈로 위협당하는 인물들을 통해 직접적 노출이 없음에도 신사다움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다.
큐리에이트라고 '야겜'과 콘솔용 신사 게임 사이에서 적절한 줄타기에 능숙했던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는 노골적 묘사를 위한 성인용 외부 패치를 내놓는, 스팀의 여느 성인용 게임과 다르지 않았다.
아트엄프에 합류한 우스다 유지로는 오리지널 게임 브랜드 큐리에이트 설립을 이끌며 글 중심의 비주얼 노벨부터 디펜스, 어드벤처 등 다양한 게임 장르를 미소녀 게임에 엮어냈다. 이 시기에는 DLsite나 FANZA 게임즈 등 성인 사이트에서는 노골적인 성인 게임을 만들고, 스팀이나 콘솔에서는 상대적으로 대상 연령대가 낮게 수정된 버전을 출시했다. 스팀 버전은 외부 패치로 성인 게임 요소를 복구시키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스팀 등에 출시되는 성인 게임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노골적인 선정성을 가진 게임은 일본 게임 등급 기구 CERO의 등급 분류를 받지 못한다. 일본에 잘 갖춰진 가정용 게임 시장 출시가 아예 물건너간다는 소리다. 선정적인 부분을 자르고 줄여 어찌저지 18세 이상 이용가인 CERO Z 등급을 받아내 콘솔 판매 길을 열었다고 치자. 딱히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건 아니다. Z 등급 게임은 일반적인 오프라인 매장 진열대에 공개되지 못한다. 마치 일본 대형 할인점 한구석에서 팔리는 성인용품처럼, 결계라도 쳐진 듯한 별도의 공간에서만 구매할 수 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CERO 등급에만 집중해 특유의 에로틱함을 거세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본래의 신사다운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존의 성인 게임에서 여러 요소를 잘라내 출시하는 콘솔 버전은 원래 의도한 내용의 일부가 삭제된, 불온전한 게임에 그친다.
결국 큐리에이트는 성인들을 위한 게임만의 영양소는 살리면서 시장에 일반 게임이라는 맛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한계, 17세 이용가인 CERO D 등급 작품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자극으로 가득해 되려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 살덩이가 아니라, 풋풋한 사춘기 소년의 가슴을 뛰게 하는 아슬아슬함. 큐리에이트는 그렇게 신사의 게임을 만든다.
그런 줄타기에 성공한 게임이 갑작스레 국내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던 '버니 가든'이었고, 오늘 소개한 '프리즌 프린세스 함정에 빠진 공주들'이다. 큐리에이트의 이런 곡예는 D3 퍼블리셔에서 '불릿 걸즈 판타지아', '오메가 라비린스' 등을 통해 일찌감치 콘솔과 성인 게임의 한계를 흐리게 한 우스다 유지로 프로듀서의 능력일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조금 더 필요했던 가정용 게임 흥행에의 갈망에 나온 몸 비틀기였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갑작스레 큐리에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건 신작이 출시되어서도 있지만, 일을 해야 할 시간에 당당하게 신사의 게임을 즐길 수 있어서다. 오늘도 고된 학업에, 노동에 허덕이는 성인들이여, 당당히 신사다움을 즐기는 것이 부럽지 아니한가? 하지만 마냥 좋지만도 않은 게 사실 난 성인 게임의 범부다. 혼자 플레이해도 괜히 부끄러워 뒤를 돌아보고 '이건 일이라서 하는 거야'라고 호들갑을 떠는 그런 범부. 게임에 신사들이 있다면 나는 게임 무뢰배 정도일까? 그렇기에 떳떳한 신사의 게임을 만드는 이들의 대단함을 크게 느낀다.
사실 오늘날 스팀이나, 그보다 제약이 더 낮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벗고, 벗기며 얼마든 쉽게 성인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시장이 이미 마련됐다. 특히 스팀이 불법적인 주제나 트롤링이 아니면 모든 콘텐츠를 모두 허용하면서 성인 게임 시장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생성형 AI 콘텐츠 도입이 가장 덜 비판받는 시장이라는 특수성에 너도나도 뛰어들고, 올해 열린 세계 최대 규모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 GDC에서는 섹스 게임 개발 노하우가 공유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큐리에이트는 섹스 게임이 아니라 신사용 게임을 만든다.
모든 이들이 즐기는 게임이라는 시장에서 놀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고민하며 창작물을 만들어가는 노력과 중요함 역시 인정받아 마땅한 가치다. 하지만 그게 모두가 만족하진 않을지언정, 누군가는 분명 만족할 게임을 만드는 것 역시 낮잡아볼 이유가 되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신사의 게임만의 길을 가는 큐리에이트의 길은 분명 의미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출시될, 많은 신사가 음미할 게임들이 기대되기도 한다. 언젠가 나도 신사가 되길 바라며.
웹진 인벤 강승진 기자
2025-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