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몹 잡는 재미, 소위 말하는 손맛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캐릭 두개를 키웠다. 오픈베타때 난이도 2로 곰드루를 키웠고, 정식출시 후에는 난이도 1로 도적을 키웠다. 두 캐릭의 재미는 그야말로 천지차이였다. 곰드루를 키우면서는 한시간에 한번씩 꾸벅꾸벅 졸면서 뭐 이딴 병신겜이 있나 쌍욕을 하면서 꾸역꾸역 깼지만, 도적은 속도감도 좋고 몹들 퍼벙펑 터져나가는 쾌감도 훌륭했다.
도적 같은 경우에는 스킬간의 콤보를 이용해서 효과적으로 자원관리를 하면서 딜을 넣는 것도 재미있었다. 이번 작은 와우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도적은 그 중에서도 굉장히 긍정적으로 영향을 받은 케이스라고 생각한다. 난이도나 캐릭에 따라 재미의 밸런스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은 개선이 필요할 듯 하다.
2.
그래픽은 10/10.
지난 몇년간 회사의 부침 속에서도 아트팀만큼은 블빠들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고, 그 놀라운 퀄리티는 본작에서도 마찬가지다. 아트팀은 디아블로 4의 모티브가 되는 중세 유럽의 암흑기를 그대로 게임 속에다 옮겨놓는데 성공했다. 중세 유럽 관련한 자료는 물론이고, 그 당시를 표현한 다른 게임이나 영상물도 많이 참조하고 공부한 것이 보인다. 가끔씩 구경 포인트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그야말로 감탄이 나올 정도. 컷씬이나 시네마틱의 연출도 영화가 따로 없는 수준이다.
단, 음악은 조금 아쉽다. 음악이 너무 느리고 무겁고 단조로워서 묻히는 느낌이 든다. 하나하나 들어보면 마찬가지로 꽤 괜찮은 음악들이라 더욱 아쉽다.
3.
서론을 이렇게 시작하니까 마치 디아블로 4가 되게 제대로 된 게임 같은데, 미안하지만 이 게임의 장점은 이게 끝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위에 언급한 내용을 제외한 모든 점이 단점이다.
아트팀만큼은 블빠들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고 말했던가? 반대로 말하자면 아트팀을 제외한 나머지는 최근 몇년간 유저들을 존나 실망시켜 왔다는 뜻이고, 그 처참한 수준은 본작에서도 마찬가지다.
4.
기획팀은 와우 만들던 인원들, 그 중에서도 좀 상태가 안좋은 친구들을 차출해 온 것 같다. 디아블로 3도 와우블로라는 비판을 들었는데, 디아블로 4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 많은 사이드 퀘스트, 플레이어 레벨에 따라 몹 레벨이 조정되는 레벨 스케일링, 각 액트마다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와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전개방식(이건 스토리 부분에서 다시 말하도록 하겠다), 액트에 따른 지역 구분을 없애고 하나의 오픈월드로 통합한 점 등... 이정도면 디아블로 4보다는 와우블로 2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지경이다.
와우블로인게 뭐가 문제냐고? 전부 다 문제다.
광활한 오픈필드 대부분은 그냥 죽은 공간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건 와우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와우에서도 필드는 레벨업 과정에서나 잠깐 거쳐가는 곳이고, 컨텐츠 대부분은 인스턴스 던전에서 이루어진다. 그나마 와우는 커뮤니티성이 강조된 정통 mmorpg 게임이고 몹 잡기 말고도 할게 많지만, 몹잡기 원툴인 디아블로 4에서 필드의 의미? 그냥 플레이타임을 억지로 잡아늘리는 짐일 뿐이다. 기획팀이 와우를 해 봤다면 필드사냥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텐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필드에 몹을 그렇게 배치한건지 모르겠다.
필드 관련해서 조금만 더 첨언하자면, 액트 3에서 걸어서 필드 세개를 연달아 달리게 하는 동선은 정말 역겨움의 극치였다.
5.
아이템 강화 시스템이나 엔드게임 파밍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예상으로는(그리고 다른 사람들 후기에 의하면) 꽤나 문제가 있을 것 같은 시스템이긴 하지만, 내가 직접 불편함을 느끼거나 경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을 아낀다.
내가 만약 좀 더 길게 플레이를 했다면 상기한 내용들에 관해서도 장문의 비판이 첨가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다행스럽게도 도적/난이도 1/찍먹이라는 3요소의 조합이 이 후기를 정말 많이 순한맛으로 만들어줬다.
6.
지형지물과의 상호작용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요소이다. 2010년대 초반에 양산되던 오픈월드 게임에서 가끔 보이던 행태인데, 그냥 자신들이 이런 것도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게임 핵심 요소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회성 동작을 첨가하는 것이다. 조의를 표하기 위해 X를 누르십시오 처럼. 이게 디아블로 4 에서는 일회성이 아니라는 점이 좀 더 악질적이다.
사다리 오르기, 미끄러지기, 도약 등의 상호작용은 정말 이 게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마도 분명히 디아블로 4가 영향을 받았을) 1인칭 액션 어드벤쳐 게임들에서는 단순히 점프해서 반대편 플랫폼으로 건너가는 것 자체도 게임의 핵심 요소이고, 미끄러지면서도 장애물 피하기 등의 요소를 넣는 것으로 플레이어의 집중과 컨트롤을 요구한다. 그런 게임들에서는 고저차를 이용해 전투에서 유리한 포지션을 잡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시간동안 총에 맞을 수도 있다. 읽다 보면 알겠지만 하나같이 디아블로 4와는 관계가 없는 요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써먹을 요소가 아주 없던 건 아니다. 몹 잡기 귀찮아서 달고 달리다가 사다리 올라가면 따라오던 몹들 전부 되돌아가더라.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칭찬으로 하는 말 아니다.
디아블로 4 에서의 지형지물과의 상호작용은 그냥 눈속임이다. 기획팀이 다른 게임들을 참조할 때 아무런 고민 없이 그냥 기워다 붙였다는 물증일 뿐이다.
7.
스토리, 정확히는 내러티브에도 전작과 유사한 문제가 있다. 작가진과 기획팀은 본작에서 추구한다고 주장했던 디아블로 2의 분위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디아블로 구작 분위기의 핵심은 독고다이였다. 그 누구의 동행도 없이 고독하게 디아블로를 추적하는 것이 구작 게임 플레이 경험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디아블로 1은 물론이거니와, 내러티브가 늘어난 디아블로 2에서도 npc들은 대부분 (케인을 포함해서도) 그냥 방관자 포지션이었을 뿐이다. 사막을 지나고, 밀림을 지나고, 카생을 지나서 마침내 디아블로를 처단하는 것은 오롯이 주인공(과 옆에 있는 과묵한 준영이)에게 맡겨진 역할이었다. 과묵하다는 점은 주인공에게 더 몰입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하는데, 어쨌든 그 시대의 부족한 리소스가 오히려 게임의 분위기를 만들어줬던 것이다.
디아블로 3은 보스들은 가볍고 주인공은 수다스러워서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넘어가기로 하자. 3편이 아니라 4편 이야기 하고 있으니까.
디아블로 4는? 확실히 주인공은 많이 과묵해졌다. 꼭 필요한 말 빼고는 하지 않는다. 보스들에도 위압감이 생겼다. 특히 릴리트가 나오는 컷씬들은 하나같이 공포스럽다. 도난을 유혹하는 장면이나, 도난 아들내미한테 영혼석을 박아넣는 장면, 꿈 속에서 얼굴만 크게 클로즈업 되는 연출 등. 그야말로 고전 호러 연출의 교과서적인 예시라 할 만 하겠다. 영혼을 갈아넣어서 컷씬을 뽑아준 아트팀에게 다시 한번 찬사를. 어쨌든 이런 점에서는 나름대로 분위기를 살리려고 노력했다고 볼 수 있겠으나...
결국 4편에서도 어떻게든 대화를 채워넣고자 하는 작가진의 정신병은 나아지지 않은 듯 하다. 과묵해진 주인공과 보스들의 빈 자리를 채운 것은 주인공을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잡일을 시키는 주변 인물들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들의 서사는 오로지 난잡함으로 채워져 있다. 도난 아들내미야 뭐, 도난이 움직이는 주된 동인 중 하나니까 그러려니 하자. 타이사같은 단역들한테까지 비중을 그렇게 부여할 필요가 있었나? 액트 3 초반의 도둑 커플 같은 애들은 아무리 봐도 PC 할당제의 수혜자이다.
8.
결말은 뻔하다는 소리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임 플롯이 뭐 거기서 거기지. 후속작 떡밥 뿌리면서 엔딩 내는 것도 디아블로 시리즈 오랜 전통 중 하나다.
어딘가에서 디아블로 4의 테마를 부성과 모성의 대비, 자유의지와 질서의 경계점, 뭐 이런식으로 해석한 글을 보았다. 꽤나 흥미로운 해석이라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부분도 있다. 물론 그걸 효과적으로 전달했다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지만. 막판에 꿈 속에서 한번에 주저리주저리 풀어낼 걸 액트 전반에 걸쳐서 좀 단계적으로 풀어내었으면 어땠을지?
9.
굉장히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보스 패턴들이 몇개 있다. 보스들이 전반적으로 근혐이 꽤 있는 편이다.
- 트초트 : 액트 1 호라드림 금고에서 나오는 그 보스다. 페이즈가 넘어갈수록 장판 크기가 커지는데, 막페가 되면 장판 속에 버티고 앉아서 일방적으로 때리기만 할때가 꽤 자주 있다
- 아이리다 : 액트 2에서는 그냥 딜찍누로 조져버려서 크게 체감을 못했는데, 액트 6 꿈속에서 다시 만난 아이리다는 그야말로 불합리함의 화신이었다. 대체 이년 회오리 판정은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 아샤바 : 최악의 핵노잼 보스전. 근딜로 딜 좀 치려고 하면 점프뛰어서 도망치는걸 보스라고 내놨다
그 외에 초반 딜찍누로 넘겨버려서 체감을 못했을 뿐, 패턴이 더러운 보스가 더 있을수도 있다.
11.
이하는 딱히 단락 하나를 할애해 가면서까지 언급하고 싶지는 않은 사소한? 단점들
- 지역 넘어갈때마다 잔렉이 꽤 심하다
- 마우스 클릭으로 채팅 넘기기가 안되는 버그가 있다. 다행히도 알탭 한 번 하면 풀린다
- 그래픽 버그가 꽤 있는 편이다. 다음은 직접 경험한 그래픽 버그들
* 기절 모션으로 드러누워서 이동하는 버그가 있다. 이거 꽤 웃겼는데 움짤을 못딴게 아쉽다
* 특정 순간에서 오브젝트가 두개가 되는 버그. 액트 2에서 나무에 박힌 드루이드한테 찌르는 창이나, 메쉬프의 낙타 같은 오브젝트들
- 메쉬프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난건데, 사막 뺑뺑이 도는 퀘스트도 정말 역겨움 그 자체였다. 이거 말고도 어떻게든 플레이 타임을 꾸역꾸역 늘리겠다는 의도가 보이는 구간이 너무 많다
- 레벨 스케일링 기준이 좀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다. 액트 4까지는 (아마도)20+였다가 액트 5 진입은 35+? 액트 6 막 진입할때는 다시 낮아졌다가 지옥문 들어가니 45+?
- 힘의 전서 각인을 할 때 어떤 부위에 할 수 있다고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이거 진짜 당연히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내가 못 찾은건가?
- 군중제어가 걸린 적에게 n% 추뎀이라는 옵션이 있는데, 정작 군중제어기에 뭐가 포함되는지는 인게임 설명이 없다. 이것도 진짜 당연히...(이하생략)
- 분명 지도상으로는 밝혀졌음에도 퀘스트 진행 트리거가 늦게 발동되는 경우가 있었다. 동료들이 아직 도착 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특정 위치까지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길이 열리지 않는 문제를 말하는거다
- 플레이어에게 걸리는 스턴기가 지나치게 긴데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은 매우 제한적이다
- 던전 레이아웃이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게 하는 구성이 많은건 좀 문제가 있다. 그냥 단순하기만 한 건 그다지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
- 이동기를 쓰고 나서 의도치 않게 평타가 나가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패드 최적화는 매우 잘 되어 있는데 반작용으로 키마 최적화가 그닥인 느낌이다
- 수은 들고 포탈타려는데 수은이 바닥에 떨어지는 이유는 대체? 지역템이네 뭐네 하는데 포탈 타는 장소가 그냥 같은 지역 마을이고, 애초에 지역템을 다른 지역으로 가지고 가면 안될 이유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 용사의 최후에서는 석상 두개 동시에 들려니까 하나는 바닥에 떨어지던데 이건 진짜 대체 왜? 이따위로 만든건지?
이거 그냥 만들다 만거다.
급하게 기획해서 대충 만들다가 마무리도 안하고 낸 게임이다.
12.
이 만들다 만 게임의 화룡점정은 가격선정이다.
어쩌고 에디션 13만원은 뭐 사는 사람만 사는 거니까 그러려니 하자. 일반판 8.45만원은 진심 제정신인가? 진짜 무슨 생각으로 선정한 가격인지 이해할수가 없다. 이 가격을 정한 양복쟁이 친구들은 게임을 해 보긴 한건가? 진심 자기들 게임에 엘든링이나 젤다를 넘어서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 가격을 선정한건가? 막말로 디아블로 4가 삼만원대 가격이었으면 이렇게까지 열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삼만원치곤 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8.45만원? 이건 그냥 유저 기망 행위다. 한번 팔아먹으면 끝인 패키지 게임이라서 비싸게 팔아먹고 유기할 심보로 가득이다. 와우나 돌겜 확팩은 이딴식으로 절대 못 만든다. 다음달 매출 폭락에 가만히 있던 벤브로드랑 데이비드킴까지 나와서 시말서 쓴다.
하지만 디아블로 4는 패키지 게임이고, 한번 팔아먹으면 땡이다.
그나마 본작의 가격선정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점을 찾는다면, 게임 가격에 일종의 심리적 저지선을 만들어 줬다는 점이다. 최소한 내년까지는 어떤 aaa 게임이 나오더라도 가격이 팔만원을 넘어가지는 않겠지.
13.
이하는 예상되는 질문들과 그에 대한 미리 답변
A. 그래서 너는 무슨 게임함?
Q. 세상에 할 게임은 정말 수없이 많고, 딱히 끌리는게 없으면 게임 안 할수도 있다. 일단 여기 사람들이 원할만한 답변으로는 POE. 참고로 로아는 한번도 해본적 없다
A. 나는 스토리 괜찮았는데?
Q. ㅇㅈ하는 부분이다. 스토리는 순전히 개인 취향의 영역이니까
A. 정복자 보드 찍으면서가 본겜인데 고작 30렙 찍고 니가 뭘 암?
Q. 그래서 일부러 경험 안해본 엔드게임 부분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후기 보면서 예상한 바로는 거기서도 딱히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지는 않지만
Q. 폭발사산이 뭔데 씹덕아
A. 캐릭명 만들때 문득 떠오르길래 무협용어인줄 알고 썼는데, 알고보니 갓-라노베 '닌자 슬레이어' 에서 나오는 신조어였다
Q. 인벤토리 편의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함?
A. 보석 겹치기가 되는데 미친 갓겜 편의성 아닌가? 마을 내 동선 이야기도 나오던데 딱히 크게 불편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어쨌든 후기 끝
디아블로4 인벤 자유 수라파천
2023-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