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y meets girl, 신비한 소녀와 모험을 동경하는 소년의 만남은 클리셰를 넘어 장르적 카테고리가 됐다고 봐야 합니다. 1945년부터 로맨스 소설의 클리셰를 말할 때 사용했다고 하니, 거의 100년에 가까운 역사가 있죠. 90년대와 00년대 초반까지 수많은 애니메이션, 만화, 영화, 게임 등에서 소년과 소녀의 만남을 다뤘습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등 셀 수 없이 많은 예전 명작들이 있는데다가, 요즘 나오는 작품들도 이 클리셰를 따라가서 성공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왜 이렇게 많으냐고 하면, 주제 자체가 가지는 체급과 파괴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비밀을 가진 소녀와 무한 긍정 에너지를 가진 소년은 서로 붙여 놓기만 해도 흥미로운 상황이 계속 연상됩니다. 능글맞은 아저씨 동료도 좋고, 잘난 체하는 마법사 동료도 좋죠. 찰떡입니다. 때로는 약간 비뚤어진 상황도 매력적입니다. 소녀와 소년을 붙여놓되, 현실은 매우 끔찍하게 만들고, 소년에게 비관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것도 꽤 맛있습니다. 정석으로 가든, 조금 비틀든, 반전으로 가든 재밌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주제를 가장 잘 활용했던 게임사 중 하나가 오늘 리뷰할 게임의 원작을 만든 게임아츠입니다. 모험, 소년, 소녀. 이 세 단어를 가장 잘 활용한 회사라고 생각하는데요. 준수한 게임성,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게임마다 수준급의 애니메이션을 꽉꽉 집어넣으며 단숨에 RPG 좀 치는 회사가 되었습니다. 루나 실버스타 스토리, 루나 이터널 블루, 그란디아라는 명작을 만들었죠.
예전부터 JRPG를 좋아하던 사람이라면, 파이널 판타지6, 크로노 트리거, 드래곤 퀘스트5 같은 작품을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루나 실버스타 스토리와 루나 이터널 블루, 그란디아를 최고로 꼽는 사람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오늘 리뷰할 게임은 이 게임아츠의 정수를 담은 두 작품을 묶은 게임입니다. 루나 실버스타 스토리와 루나 이터널 블루를 리마스터해 한 타이틀로 만든 게임, 루나 리마스터드 컬렉션입니다.
※ 스토리, 게임 볼륨과 관련된 가벼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게임명: 루나 리마스터드 컬렉션
장르명: RPG
출시일: 2025. 4. 18.
리뷰판: 리뷰 빌드
개발사: ASHIBI, 게임아츠
서비스: 겅호 온라인 엔터테인먼트 아메리카
플랫폼: PC, PS4, 닌텐도 스위치
플레이: PC
루나와 루시아가 돌아왔다
튕기지 않는 실버스타 스토리, 한글로 하는 이터널 블루
우리나라에서 게임아츠 게임 중 가장 인기 있었던 게임은 단연 루나 실버스타 스토리입니다. 나머지 작품은 한글화가 되지 않았거나, 메가 CD, 세가 새턴, 플레이스테이션 등으로 출시되어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루나 실버스타 스토리는 2002년에 PC로 출시했었습니다. 플레이스테이션 버전을 한글화, 한글 더빙까지 추가해서 정식 발매했죠. 게임 잡지 부록으로 주기도 했었으니, 3, 40대 게이머라면 꽤 친숙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하지만 당시에 루나 실버스타 스토리엔 굉장히 큰 문제가 있었는데, 버그도 많았고 엄청나게 자주 튕기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게임을 정상적으로 끝마치는 게 꽤 힘들었던 기억이 있는데요. 루나 리마스터드 컬렉션은 아주 당연하게도, 이런 기초적인 부분이 모두 해결된 상태입니다. 1994년에 발매한 루나 이터널 블루는 실버스타처럼 PC와 한글화로 출시한 게임이 아니라,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덜 유명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훨씬 더 낫다는 평가를 받는 게임입니다. 실버스타 스토리를 버그나 튕김 없이 할 수 있고, 전작보다 더 낫다는 평가를 받는 이터널 블루를 정식 한글로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루나 리마스터드 컬렉션에 들어있습니다.
루나 실버스타 스토리는 루나 더 실버 스타라는 이름으로 1992년 메가 CD로 발매한 것이 최초의 게임이고, 플레이스테이션, PC, PSP버전으로 많이 이식되었는데요. 루나 리마스터드 컬렉션에 포함된 1, 2편 모두 플레이스테이션 버전이 기반이 됩니다. 그 당시 사용했던 아트, 음악, 게임플레이 모두 이 플레이스테이션 리메이크 버전에서 따 온 것입니다.
루나 시리즈의 장점은 아름다운 이야기와 일러스트, 멋진 애니메이션, 뛰어난 음악에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에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특히 수려한 캐릭터 디자인은 수많은 소년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는데요, 캐릭터 디자인을 담당한 사람은 지금도 현역에서 활동중인 쿠보오카 토시유키입니다. 그가 아이돌 마스터의 초기 디자인을 담당해 아이돌 마스터의 아버지라고 불리기 전, 루나 시리즈의 캐릭터 디자인과 이미지 무비의 감독을 맡았습니다. 캐릭터 디자인은 지금도 충분히 통한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부분은 어떨까요? 30년 전의 게임을 2025년인 지금 다시 하기 위해선, 일종의 추억 보정이 있거나, 시대를 초월한 장점이 게임 안에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이 이 게임을 바라보는 시선이 두 개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루나 시리즈를 해봤던 사람이고, 좋아했던 이유가 명확하게 있는 사람이라면, 이 리마스터드 컬렉션도 같은 재미와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또 하나의 시선도 중요한데, 시리즈를 해보지 않았던 사람도 즐겁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입니다. 30년 전 게임을 추억 보정 없이 해도, 지금 해도 재미있는가에 관한 부분이죠.
30년전 게임을 지금해도 재미있는가?
어떤 것을 기대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루나 리마스터드 컬렉션은 플레이스테이션 리메이크 버전에서 달라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당시의 그래픽, 일러스트, 음악, 게임 플레이가 거의 같습니다. 특히 그래픽적인 변화는 적다고 봐야 합니다. 화면 위아래를 뿌옇게 만드는 효과로 맵에 아주 약간의 입체감이 들게끔 한다거나, 도트 기반의 아트와 애니메이션이 조금 더 깔끔하게 보이는 정도가 전부입니다.
어떤 작업을 하면 리메이크고, 어떤 작업을 덜 하면 리마스터인지, 그리고 리마스터한 게임도 바꾸고 개선하는 정도가 천차만별이라, 리마스터의 정도에 명확한 기준은 없지만, 루나 리마스터드 컬렉션은 바꾸고 개선하는데 소극적인 편에 속한다고 봐야합니다. 전설적인 JRPG를 2025년에 맞게 퀄리티를 극한으로 끌어올려, 지금 해도 세련되어 보이는 작품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입니다. 추가된 콘텐츠는 없고, 개선한 부분도 예전 게임을 옆에 틀어놓고 비교하지 않는다면 눈에 바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튕기지 않는 루나 실버스타 스토리를 할 수 있다'와, '정식 한글화가 없었던 루나 이터널 블루를 한글로 할 수 있다'뿐인 게임은 아닙니다. 추가된 편의성인 전투 배속 기능은 게임 플레이에 꽤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JRPG, 특히 고전 JRPG는 중요한 몇 번의 전투 말고는 대부분 지루합니다. 전투 중에 조작할 것도 적고, 행동 패턴도 단순합니다. 한 던전에 입장 후 몬스터의 강력함을 대강 측정해 본 다음이라면, 그 즉시 딸각 게임이 됩니다. 전투가 끝나면 체력과 MP를 채우고, 세이브도 가끔 해주면서, 지루한 전투를 반복해야 합니다. 보스전은 재밌는데, 반복 전투 과정이 다가오면, 게임에 정이 쉽게 떨어질 수도 있죠.
이런 지루한 전투와 재미있는 전투에 소요되는 시간을 비교하면 지루한 쪽이 압도적으로 길다는 것이 고전 JRPG가 가진 공통적인 문제점인데, 기존에 없던 전투의 배속을 넣으니까, 잡몹전의 시간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게 되어 플레이의 질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모험-전투-스토리의 반복에서 자잘하고 의미 없는 시간이 많이 단축되니, 재밌는 전투에 훨씬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이야기가 단절되는 느낌도 적어져서 몰입이 쉬웠습니다. 특히, 루나 시리즈는 애니메이션 컷씬을 많이 넣으며 이야기에 집중한 게임 시리즈이기 때문에, 게임을 한다는 느낌과 함께 당시의 애니메이션을 감상한다는 인상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 얘기가 나온 김에 말해보자면, 루나 시리즈의 스토리가 낡은 건 확실합니다. 전형적인 왕도물입니다. 매력적인 히로인 루나와 루시아, 착해빠진 주인공 아레스와 히이로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곳을 모험하면서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입니다. 30년 전에는 뛰어난 스토리이고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엄청 뛰어나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지금 봐도 괜찮은 수준, 다소 슴슴하지만 여전히 먹을 만한 이야기입니다. 추억이라는 소금이 가지고 있다면, 꽤 맛있게 드실 수 있을 것 같지만요.
특히, 많은 사람들이 1편인 루나 실버스타 스토리는 해보고, 2편인 루나 이터널 블루는 해보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만약 그렇다면, 이 게임을 해보는 걸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루나 이터널 블루가 전작보다 거의 모든 면에서 나은 게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애니메이션 작화가 씬마다 흔들리는 걸 제외하면, 그래픽, 스토리, 연출, 전투, 게임 시스템 등 게임에 포함된 대부분의 것들이 진보했습니다. 1에 등장했던 캐릭터의 후손이라든지, 전편의 이야기를 회상한다든지, 계속 전작의 기억을 떠올리게끔 만드는데, 그런 요소를 볼 때마다 반갑습니다.
낡은 부분은 스토리만 있는게 아닙니다. 게임 플레이가 배속 말고는 원형에 아주 가깝기 때문에, 현대 JRPG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없습니다. 캐릭터는 정해진 레벨에 정해진 스킬을 배울 수 있습니다. 스킬을 찍는다거나, 능력치를 내 마음대로 찍을 수 없습니다. 동료 캐릭터 역시 정해진 역할만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됐고요. 당연하게도 캐릭터의 성격적인 입체감도 느낄 수 없습니다. 주인공은 주인공답게, 악당은 악당답게, 조연은 조연답게 뻔하게 행동합니다. 스토리의 개연성도 연하고요, 재미있는 전투 기믹이나 탁월한 던전 퍼즐도 없습니다. 특히 1편인 루나 실버스타 스토리는 더 그렇습니다. 이터널 블루는 최신 JRPG에서 한 번쯤을 봤을 법한 시스템의 원형은 볼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이 게임은 어떤 것을 기대하느냐에 따라 만족도가 크게 달라지는 게임입니다. 어렸을 때 게임기가 없었음에도, 잡지에서 루나의 일러스트나 공략만 보고, 게임 속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해봤다면, 그 사람에게 이 작품은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추억이 없는데, 할만한 고전 JRPG를 찾는 사람이라도 꽤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최신 JRPG에서 얻을 수 있는 비주얼 쾌감, 웅장한 사운드, 정교한 게임플레이를 바란다면 절대 들어있지 않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이 게임을 여전히 좋아한다
나는 아저씨가 되었지만, 너는 그대로구나
고전은 세 번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어릴 때 한 번, 나이가 들어서 한 번, 그리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굉장히 공감하는 말이고, 게임에서도 이 말이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레스보다 더 어렸던 무렵, 루나 실버스타 스토리를 처음 할 때는 아레스의 모험이 내 모험이었습니다. 루나는 내 첫사랑이었고, 마법 황제는 세상에서 가장 미운 악당이었습니다. 루나의 세계는 어린 내가 상상할 수 있었던 가장 환상적인 판타지 세계였습니다. 지금도 JRPG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인 게임이었습니다.
지금은 2025년이고 20년이 넘게 지났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더 좋은 품질의 게임을 수없이 해봤습니다. 루나 시리즈보다 더 좋아하는 게임도 많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고전이 줄 수 있는 것을 순수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의 설레임, 아련한 기억들, 그리고 그때가 몹시 그리워지게 하는 추억이 담겨 있습니다. 이 게임은 그대로입니다. 이게 가장 큰 단점이고, 높은 평가를 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게임에 여전히 포함되고, 죽기 전에 또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도 게임에 들어있는 것이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촌스럽지 않은 애니메이션
아주 약간 개선된 편의성
괜찮은 볼륨
너무 낡은 티가 나버리는 부분들(폰트 등)
추억에 비례한 감동
웹진 인벤 서동용 기자
2025-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