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게임 역사의 초기를 되돌아보면 기라성같은 작품들이 쉬지 않고 나온다. 이름만 유명했던 작품부터, 실제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들까지, 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이 파도는 2000년대 초, '온라인 시대'에 접어들며 점점 사그라들었는데, 이 국산 게임의 황혼기에 가장 크게 이름을 떨친 개발사 중 하나가 바로 '손노리'다. 30대 중반 이상 아저씨들이라면 다들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 그리고 요즘 게이머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이름.
그리고, 이 '손노리'의 전성기는 정말 어마무시했다. 애증의 게임 '포가튼 사가'부터, 당시 게임 잡지만 열면 광고가 보이던 '강철제국', 그리고 '악튜러스'와 '화이트데이' 이어지는 라인업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웅장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 바로 이들의 첫 작품이자 94년 출시작인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다. 그리고, 2025년에 이르러, 이 '어스토니시아 스토리'가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리파인'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2025년 5월 24일, 일산 킨텍스에서 진행된 'PlayX4'의 3일차에, 제작 총괄 대원미디어와 개발사 웨이코더, 그리고 원작 개발에 참여했던 손노리 이원술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리파인'에 대한 발표회가 진행되었다. 지난해 진행된 최초 공개 이후, 정확히 1년 만이었다.
'리메이크', '리마스터' 아닌 '리파인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리파인'의 핵심은 '유지', 그리고 '개선'이라는 두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중심이 되는 핵심 플로우는 그대로 유지되며, 등장 인물이나 세계관 또한 동일하다. 게임의 전체적인 흐름 역시 동일하다. 캐릭터를 성장시키고, 다양한 동료와 함께 여러 퀘스트를 통해 세계관을 탐험하게 되는 원작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간다.
다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바뀌는데, 월드 이동 방식이 '오버월드' 형식에서 던전과 같은 탐색형 월드맵으로 변경되며, 원작에서 등장하는 조연 캐릭터를 영입해 성장시킨 후 파티에 편성할 수 있는 '용병 시스템'이 더해진다. 쉽게 생각하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대폭 늘어났다.
또한, '차원 균열'이라는 무작위성 이벤트가 더해지고, 메인 스토리밖에 존재하지 않던 원작과 달리 여러 퀘스트를 통해 서사를 더욱 풍성하게 꾸려냈다. 막타를 치는 캐릭터에 따라 개별 경험치가 적용되던 전작과 달리 경험치 배분도 파티가 균등하게 받도록 바뀌거나, 무의미한 노가다 구간(2002년작 어스토니시아 스토리R의 주된 문제점이었다)을 없애는 등 일반적인 편의 기능도 여러 측면에서 개선되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전투 시스템'의 변화다.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모든 캐릭터의 '클래스'가 정립되었다는 점인데, 다소 애매했던 역할의 캐릭터들이 모두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클래스 조합, 시너지, 상성에 따라 원하는 대로 파티를 구성할 수 있다.
또한, 각 몬스터마다 '약점'이 존재하고, 공격의 방향(옆에서 공격하느냐, 뒤에서 공격하느냐) 또한 피해량에 큰 변화를 주게 되면서 전략성이 한층 강화되었다. 여기에 더해지는 변수가 바로 전투 맵의 변화인데, 기존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굉장히 넓고, 방해 요소에 집중된 맵이 주를 이루었다면, 본작의 전투 맵은 굉장히 다양한 모양새를 띄고 있어 매 전투마다 보다 효율적인 전투를 고민하게 만든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리파인'은 올해 12월 중 닌텐도 스위치와 PC로 출시될 예정이다.
질문과 답변
게임에 대한 소개가 끝난 후, 현장에 모인 게이머 및 미디어들을 대상으로 자유로운 Q&A 세션이 이어졌다. 제작 총괄을 맡은 대원미디어 김형길 부장, 개발사 '웨이코더'의 서기원 대표, 원작 개발자인 손노리 이원술 대표가 무대에 올라 질문에 대한 답변을 진행했다.
Q. 이원술 대표에게 먼저 묻고 싶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들어지는 작품이다 보니 걱정이 많았을 것 같은데, 어디까지는 꼭 지켜 달라는 형태의, 개발사에게 제시한 어떤 기준 선이 있는가?
이원술 대표: 딱 하나 있었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워낙 오래 된 게임이라 사실 과거 게임을 플레이했던 게이머들도 잘 기억을 못 한다. 전체적인 플롯, '지팡이를 찾아가는 모험' 정도는 기억하지만, 주인공 이름도 잘 기억 못 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무조건 원작의 무언가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핵심 플롯만 유지한다면, 다른 모든 걸 현 시대에 맞춰 다시 만들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Q. 웨이코더 서기원 대표는 개발사의 대표이면서 동시에 원작의 팬이라 말했다. 원작을 다시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느낀 압박감이나, 에피소드는 없었나?
서기원 대표: 가장 처음으로 돈 주고 샀던 게임이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였다. 그런 만큼 고민이 뒤따른 건 사실이었고, 유지해야 할 것과 바꾸어야 할 부분을 구분하는 작업을 가장 먼저 진행해야 했다.
문제는, 비교적 나이가 어린 개발자 친구들이 이 게임을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나름의 향수와 추억을 지니고 있지만, 이 공감대를 지닌 개발자가 적다 보니 그 부분이 어려웠던 것 같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그 자체에 의문을 느끼는 구성원들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 또한 하나의 피드백이 되어 주었다. 이번 작품은 단순히 30년 전 원작을 즐겼던 게이머들의 향수를 자극하기 위한 게임이 아닌, 새로운 게이머들에게도 어필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인 만큼 그들의 의견 또한 작품을 만들어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Q. 웨이코더는 이전에도 환세취호전과 포트리스를 리메이크했던 바 있다. 이쯤되면 리메이크의 전문가라 봐도 될 것 같은데, 혹시 '포가튼 사가'를 비롯한 손노리의 다른 작품도 작업할 계획이 있는가?
김형길 부장: 이 부분은 내가 대답해야 할 것 같다. 아직 타이틀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이미 개발중인 타이틀이 존재하며, 매우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타이틀 또한 별개로 존재한다. 아직 말하기엔 이른 시점이며, 오늘의 주인공은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리파인인 만큼 말을 아끼겠지만, 최대한 빠른 시간에 별도로 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하겠다.
Q. 원작이 워낙 오래 된 게임이다 보니 메인 스토리의 서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발될 줄 알았다. 이와 달리 사이드 콘텐츠와 퀘스트를 추가하는 방향으로 볼륨을 만들어냈는데, 이유가 있는가? 또한, 용병 시스템이 존재하는 만큼 이에 맞는 엔드 콘텐츠가 필요할 것 같다.
서기원 대표: 우리는 작품을 만들면서 원작과 2002년작인 '어스토니시아 스토리R'을 모두 참고해가며 만들었다. 나아가 작년 발표 이후 온라인상에 퍼진 많은 피드백도 개발 방향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핵심은, 메인 스토리를 꺾거나, 변조하진 않는 선에서 대사 라인과 연출을 바꾸어 몰입감을 더하는 쪽이었다.
엔드 콘텐츠의 경우 '회차 플레이'를 지원하는데, 회차 플레이에서는 전 회차에서 육성한 용병을 활용할 수 있다. 이전 회차에서 놓친 부분을 찾아내거나, 다른 방식의 플레이를 추구할 수 있다.
Q.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고, 제한된 인원의 파티를 편제하는 게임의 경우 필요성을 따지다 보면 애정하는 캐릭터들이 도태되는 경우가 부득이하게 벌어진다. 본작의 캐릭터 밸런싱은 어떻게 이뤄졌나?
서기원 대표: 클래스 정립이 그런 차원에서 진행된 변경이다. 클래스에 맞춰 시너지와 상성 효과를 볼 수 있게 구성되었기 때문에 클래스만 맞춘다면 도태될 캐릭터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건 주인공인 '로이드'의 클래스를 정립하는 것이었다. 세 번 정도는 바꾼 것 같다.
Q. 이번 작품은 PC와 닌텐도 스위치로만 출시되는데, 혹시 다른 플랫폼도 고려하고 있는가?
김형길 부장: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일단은 스위치를 중심으로 전개해나갈 예정이다. 닌텐도 스위치가 아무래도 남녀노소 모두 접근하기 쉬운 플랫폼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Q. 이후 별개의 DLC나 확장팩도 고려하고 있는 바가 있는가?
김형길 부장: 아직은 없다. 원작 스토리와 세계관을 표현하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으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건 아직 우선 순위가 높지 않다.
Q.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하면 특유의 '손노리식 개그'를 빼놓을 수 없다. 다만, 30년 전과는 개그 감성이 상당히 다른 요즘인데, 어떤 고민이 있었나?
이원술 대표: 현재 빌드를 끝까지 플레이해봤는데, 개그 감성이 약간 아쉽기는 했다.(웃음) 출시 전까지 진정한 손노리식 개그를 조금 더 제안해볼 예정이다.
김형길 부장: 이원술 대표님이 개그를 굉장히 좋아하신다. 아마 출시 빌드에서는 그걸 조금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Q. 먼 옛날 이원술 대표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내용은 10분의 1밖에 나오지 않았으며, 앞으로 9편 이상 더 나올 수 있다"라는 내용이었는데, 후속작에 대한 욕심은 아직 없나?
이원술 대표: 많은 분들이 잘 모르지만 2편은 나오긴 했다. 당시 패키지 콘솔 시장이 좋지 않다 보니 현실적으로 후속작을 만들 여력이 없었던 건 사실이다. 다만, 이번 작품의 결과가 좋다면, 이어질 이야기들도 계속 펼쳐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내가 죽기 전에 결말을 낼 수 있도록 다들 도와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웃음)
Q. 오랜 팬 게이머들은 향수를 느끼며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지만, 신규 유저들은 다소 생소하게 느낄 것 같다. 새로운 게이머들이 본작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줄 수 있는가?
이원술 대표: 옛 게이머들은 사실 걱정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바뀌었는지를 보면서 즐기기만 해도 재미있을 테니까. 새로운 게이머들에게 바라는 점은 '읽는 것'이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를 처음 개발할 당시, 한국 RPG는 거의 없었다. 일어, 영어로 만들어진 게임을 플레이하며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림만 보며 스토리를 유추하다가, 한국어로 만들어진 RPG를 보고 싶다는 마음에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때문에, 당시에도 대사 한 줄 한 줄을 매우 공들여 썼던 기억이 난다. 조금은 느긋하게, 텍스트를 읽으면서 게임을 플레이하면 아마 재미도 더 풍부해지리라 생각한다.
Q. 마지막으로,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리파인'을 기다리는 팬분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는가?
김형길 부장: 주시는 기대만큼 잘 마무리하고, 올 겨울에 문제 없이 출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이원술 대표: 최근에 '폭삭 속았수다'라는 드라마를 감명깊게 봤다. 액션이나 치정이 아닌, 가족 간의 휴머니즘을 바라보는게 무척 즐거웠던 것 같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원작을 플레이했던 게이머들도, 아마 지금쯤은 비슷한 나이대의 자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게임을 통해, 같은 추억과 공감대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서기원 대표: 개발자이자 팬으로서, 가장 긴장되는 날이 아닐까 싶다. 이번 전시 또한 소중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많은 감상을 남겨 주시길 부탁드린다.
웹진 인벤 정재훈 기자
2025-05-24